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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45분

  갑자기 추워진 11월 어느 날 오후 1시 45분.

  시청광장 건너편, 담벼락이 끝나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하루 세 번 있는 덕수궁의 수문장 교대식을 기다리는 관광객들인가보다. 굳이 수문장 교대식을 관람할 생각이 없는 나는 관광객들이 서성거리는 대한문 앞을 지나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어서 입장한다. 궁궐 안이 제일 한가한 시간이 교대식 즈음이니 교대식 10분쯤 전에 입장하면 30~40분 정도는 여유 있게 관람을 할 수 있다.

  덕수궁은 지하철에서도 가깝고 규모도 작아서 근처에 온 김에 잠시 산책하기 좋은 공원으로서는 좋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사연들을 생각한다면 가슴이 쓰리고 울적한 기분이 드는 궁궐이다. 그래서인지 시청역 근처에서 몇 년 동안이나 프로젝트를 할 때도 한 번도 안 들렀던 기억이 있다.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의 올바른 이름

  덕수궁(德壽宮)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부터 선왕(先王)이 왕위를 물려준 후 머무는 궁궐을 지칭하던 이름으로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던 개성의 거처와 한양으로 천도 후의 거처를 모두 덕수궁이라 불렀던 기록이 있다. 굳이 역사적인 배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덕수德壽 라는 이름을 보아도 선왕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붙였던 이름이 아닌가 싶은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2011년에 현재의 덕수궁의 명칭을 경운궁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민원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으나 문화재청은 일단 "보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사실상 무산된 셈이다. 비록 공식적인 명칭은 덕수궁이라고 하지만 원래의 이름인 경운궁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경운궁은 원래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으로 남아 있었던 것을 100여 년이 지난 후 발생한 임진왜란 때 피난 갔던 선조가 돌아왔으나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버려 거처가 없자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주변의 민가들을 징발하여 정릉 행궁으로 사용했다. (정릉동은 원래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이 이 근처에 있어서 정릉동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현재의 성북구 정릉으로 이장한 후에도 이 일대를 대정릉동, 대정동과 소정릉동 혹은 소정동으로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정동과 서소문동, 무교동 등으로 분할 변경되었다고 한다)


  광해군 원년에 창건된 창덕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광해군이 창덕궁의 보충 공사를 명하면서 잠시 머물렀다가 공사가 끝나고 이어하면서 정릉 행궁에 경운궁이라 이름을 내려 정식 궁궐로 승격시켰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후 즉위한 인조의 즉위식도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거행하였다. 인조 즉위 후 즉조당과 석어당 2채를 제외한 나머지 가옥과 대지를 모두 원주인들에게 돌려준다.


  근 300년 동안 즉조당과 석어당 2채의 전각만 남아 있던 경운궁은 고종황제가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삼기 위해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가면서 법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물론, 1904년에 함녕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타 버리면서 일부는 복구되지 못하고, 2층이었던 정전(正殿)인 중화전은 단층 목조건물로 재건되는 등 이전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된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궁궐이다.



경운궁 돌아보기

  경운궁은 (원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워낙 작은 궁궐이라 편한 대로 돌아보더라도 얼마 안 걸리지만, 대한문(大漢門) - 금천교(禁川橋) - 광명문(光明門) - 중화문(中和門) - 중화전(中和殿) - 준명당(浚明堂) - 즉조당(即祚堂) - 석어당(昔御堂) - 덕홍전(德弘殿) - 함녕전(咸寧殿) - 정관헌(靜觀軒) - 정관헌 뒤 산책로 - 석조전(石造殿) 그리고 예원학교 옆에 있는 최근에 공개된 중명전(重明殿) 순으로 돌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경운궁(덕수궁) 방문 계획이 있다면 석조전 관람예약을 미리 하고 가는 것도 좋겠다. 매번 예정에 없이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잠시 들러서 미처 석조전 예약을 하지 못해서 내부관람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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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大漢門)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원래 정문이 아니었다. 경운궁의 정문은 정전(正殿)인 중화전, 중화문의 남쪽에 인화문(仁化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화문의 앞쪽으로 제법 높은 언덕이 가로막은 데다 큰길을 내기가 어려워서 1899년경에 동쪽으로 별도의 문을 만들었고,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남아 있던 인화문은 그나마도 1904년에 함녕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소실되었다. 동쪽으로 만들었던 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경운궁의 화재에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고 1906년에 간단한 수리를 하면서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었다. 원래의 위치는 태평로(지금의 세종대로) 한가운데였으나, 교통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1970년대에 지금의 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금천교와 중화문까지의 산책로

  대한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다. 궁궐의 정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금천교는 궁궐의 궐내와 밖을 나누는 다리로, 금천교를 흐르는 냇물은 명당수라고 하여 궁궐을 드나드는 모두가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의미가 있다.


<대한문과 금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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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문(光明門)

  금천교 앞쪽의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정전(正殿)인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중화문이 나오고 좀 더 안쪽에 뜬금없이 신기전과 범종, 자격루가 있는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원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의 정문이었던 광명문이다. 일제에 의해 흥천사 범종과 자격루, 신기전을 전시할 목적으로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광명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보고 있으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광명문>


중화문과 중화전

  경운궁의 중문인 중화문을 들어서면 어도의 양옆으로 품계석이 늘어서 있고, 2단의 월대와 정전인 중화전이 나온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중화전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回廊)이 없다는 점이다. 원래는 중화문 옆을 둘러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고 현재는 중화문의 동쪽에 행각만 남아있다.


<중화문과 중화전>


 

<품계석과 중화문>


  중화전은 경운궁의 정전으로 1902년 창건 당시에는 2층 전각이었으나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 단층으로 중건했다.


<중화전>


  대한제국 때 건설했기 때문에 중화전 답도에는 제후국을 상징하는 봉황이 아니라 황제국을 상징하는 용 2마리가 새겨져 있다. 1985년 1월 8일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중화전 답도>


<중화전 내부 - 경운궁의 어좌는 보존을 위해 국립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하나의 포스팅으로 끝내려 했으나, 쓰다 보니 너무 길어지면서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서 어쩔수 없이 나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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