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2018. 3. 1.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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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20년 가까이 반복해왔던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구상도 하고, 생각도 정리할 겸 여행을 떠났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두고 혼자서.

  유럽행 왕복 비행기 표 한 장만 달랑 들고 정처 없이 떠돌던 그때,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티틀리스(Titlis) 산을 가기 위해 엥겔베르그에 들렀습니다.

  엥겔베르그역에서 내려서 로프웨이 승강장에 도착하니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한참을 기다려서 받은 대답은 기술적인 문제로 곤돌라가 티틀리스 정상까지는 운행하지 못하고 티틀리스 산 중턱에 갈아타는 곳인 트륍제(Trübsee) 라는 곳까지만 운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같았으면 미리 안내판을 세우고 안내 방송을 했을 텐데, 그냥 줄을 세워 놓고 30분 넘게 걸려서 창구 앞에 다다라서야 그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그냥 트륍제(Trübsee)까지라도 가겠다고 왕복 티켓을 끊어서 올라갔다가 만난 풍경입니다. 

  마침 엥겔베르그역에 내렸을 때부터 내리고 있던 비가 거의 그쳐가면서 산 중턱에 걸린 구름과 함께 산책하면서 스위스가 주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 한 장입니다. 멀리 만년설이 덮인 산꼭대기에 티틀리스 정상 휴게소가 보일락말락합니다. 한참을 산책하다 보니 정상까지 가는 로프웨이가 다시 가동을 시작해서 티틀리스 정상에 올라가긴 했는데, 오히려 트륍제(Trübsee) 근처에서 누리던 그 감흥이 들지 않더군요.

  컴퓨터 하드디스크 하나가 고장이 나면서 기존의 데이터를 정리하고 백업하다가 이 사진을 보는데 문득 이육사 선생의 '광야'가 생각이 나서 글 첫머리에 인용을 해봤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때가 가끔 생각이 나서 평소에 그렇게도 싫어하던 둘레길을 짧게 돌기도 합니다. 다음번에 갈 때는 꼭 사랑하는 사람과 가겠다고 다짐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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