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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다

  가장 죽고 싶은 모습은 가장 살고 싶은 모습이다


지금쯤 내 고향엔 보리 이랑 푸르고

동백꽃 산벚꽃이 한창이겠다


환하디환해서 더 서러운 봄날 아침이면

나는 냉기 어린 벽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고향으로 한 발짝 두 발짝 걷다 돌아서다

문득 내가 가서 죽고 싶은 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죽기 좋은 자리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아니던가


그리고 나는

내가 남은 생을 바쳐 이룰 일을 생각하곤 한다

도토리는 자신이 참나무로 피어날 것을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내가 마침내 해내야 할 일이 지금 이렇게

나를 밀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삶의 끝을 생각한다

끝이란 죽음만이 아니고

끝이란 도달점이고 목적지이고

그래서 내 삶의 지향점이기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죽어갈 것인가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방향 짓는 나침바늘이기에

나는 지금 이렇게 세상 '끝'자리에서 서성이며

혼자 빙그레 내 삶을 들여다보곤 하는 것이다

창살 너머로 봄꽃이 환하고 새싹들 눈 시린 봄날 아침이면

나는 침침한 벽 속에서 한 발짝 두 발짝 걷다 돌아서다

혼자말처럼 누군가의 귓속에 속삭이곤 하는 것이다


살아도 죽어도 참 좋은 날이다


    -박노해 산문집 "오늘은 다르게" 중에서


   파란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아침부터 박노해 시인의 책 "오늘은 다르게"에 나오는 시 한 편이 생각이 났습니다.

  분홍빛 매화와 샛노란 산수유꽃이 보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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