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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접시꽃이 만개한 산책길에서

  주말 아침, 동네 한 바퀴 산책하러 나간 길에 큼지막한 예쁜 꽃을 만났습니다. 꽃의 형태만 보면 무궁화나 부용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무궁화로 보기에는 그냥 풀꽃인 것 같고 부용으로 보기에는 꽃의 위치가 다른 이 꽃의 이름은 접시꽃입니다. 접시꽃과 무궁화, 부용은 꽃만 보면 모두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 세 종류의 꽃이 비슷한 모양을 지닌 이유는 모두 아욱과의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접시꽃이라고 하니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입니다.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 참으로 짧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는 암에 걸린 아내가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을 써 내려간 시입니다. 

접시꽃 당신
     -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덩을 덮은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 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 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 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 새벽이 어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라며 닥쳐온 불행의 결말을 알면서도, 그 불행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시인의 태도는 부럽기만 합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 끝 구절이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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