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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계절, 2025 가을>

계절은 언제나 먼저 떠납니다.

예고도 없고, 작별 인사 따위는 더더욱 없습니다.

남겨진 이는 언제나 그 흔적을 발견하고서야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오랜만에 오른 뒷산에서 마주친 낙엽은 떨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조용하고, 버려졌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정합니다. 마치 모든 역할을 마친 뒤 남겨질 준비를 끝낸 것처럼 보입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얕은 등산로는 고요하기만 합니다. 합니다.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가 아닌, 필요 없는 소리만 남김없이 사라진 시간처럼.

 

<계절의 한 가운데>

 

한때는 계절 안에 있었습니다.

빛과 온도와 방향이 분명했던 그때는 빛과 온도, 방향이 분명했던 시기였습니다.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절이 소리소문 없이 떠나듯이 좋았던 시간들은 언제인가 사라지고 여전히 혼자 덩그러니 같은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멈춰서 있는 건지,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건지, 시간의 속도가 달라져서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버려진 것들, 2025 가을>

  절망은 대개 조용합니다. 대부분의 좌절은 큰 실패가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 속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는 것 같습니다. 기대하지 않게 되는 순간, 실망조차 하지 않는 상태의 그 무감각함... 

계절은 이미 떠났고,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있습니다.

떠난 계절, 緣에 대해서는 더이상 연연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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